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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흥사단 45년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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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광주흥사단
댓글 1건 조회 4,577회 작성일 10-12-11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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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아래 글은 창립45주년 광주흥사단 특집회보 (2010년 2호)에 올린 글입니다. 그러나 회보가 나온 이후 잘못된 부분이 있어 정정하여 다시 올립니다.>
 

  광주흥사단 45년의 발자취 
                                               

1. 들어가며

이 글은 흥사단 광주·전남지부 주관으로 만들어진 ‘광주·전남 흥사단 25년의 발자취’를 참고하였음을 먼저 알려드립니다.
이 책은 과거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보물창고와도 같은 책입니다. 25년사를 발간하기에 앞서 우선 자료를 수집하여 25년의 발자취를 연대별, 조직별, 활동별로 있는 그대로 기술해 놓은 것인데 당시 이 출판 작업을 위임받은 지금은 고인이 된 고광업 단우의 손으로 만들어졌으며 몇 개월을 걸쳐 자료를 수집한 내용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1990년 당시 우선 10여부를 복사하여 몇몇 임원들에게 드리고 현재 단소에 1권이 유일하게 남아있습니다. 그 이후 고광업 단우가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작고하게 되었고 이후 이 책의 후속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어느덧 올해가 창립45주년이 되는 해가 되었고 5년 후면 광주·전남지역에 흥사단이 뿌리내린지 50년이 되는데, 오늘 50년사의 발간이 꼭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적어봅니다.


2. 흥사단광주학생아카데미(흥광아) 탄생

광주·전남 흥사단의 전신은 광주학생아카데미입니다.
흥사단 운동을 하기로 결심한 박준 선생님(전남대 국문과 졸업, 광주일고에서 태권도 지도)을 중심으로 국성표 정성균 문홍기 박광식 박재형 고세주 박원용 등이 모여 1965년 9월 17일 무등산을 기리자는 뜻으로 ‘서석기러기’가 조직이 되었습니다. 서석기러기 창립 후 박준 선생님이 순천공고로 발령을 받아 광주를 떠나야 했는데, 서석기러기회의 임원들 중 흥사단 정신의 심리적 압박과 거리감 때문에 단과 별도의 독자적 조직으로 운영하지는 안이 나와 사람들이 그쪽으로 기울어져가고 있었습니다.  이 때 박준 선생님은 학교를 포기하고 광주로 돌아와서 단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 ‘흥사단광주학생아카데미’를 창립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65년 10월 17일’ 박준 선생님이 설득하고 규합한 17명의 열혈 청년들이 광주일고 강당에서 광주학생아카데미를 창립(회장 박원용, 부회장 윤순자)하였고, 민족의 스승 도산 안창호 선생의 민족부흥 철학을 배우고 실천하여 우리 민족과 사회를 바로 세울 주춧돌과 기둥이 되고자 이 고장에 처음으로 흥사단의 깃발을 올렸습니다.

다시 강조하건데, 광주·전남흥사단의 뿌리는 광주학생아카데미에 있고 아카데미는 곧 흥사단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흥사단본부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도 학생아카데미 1세대가 탄생하는 것에 발맞추어 지역흥사단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3. 탄생에서 광주지부가 되기까지

학생아카데미운동이 지역사회에 긍정적으로 알려지게 되고 뜻있는 인재들이 차차 모이게 되면서 1966년 3월 대학생아카데미(회장 정윤채, 부회장 이길심)와 고등학생아카데미(회장 김광민, 부회장 김치위)로 조직을 분리하여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조직의 틀이 더욱 견고하게 갖추어지게 되는 것과 발맞추어 1969년 10월 24일 광주분회(분회장 박준)가 생기고, 1980년 4월 12일에는 전남지부(지부장 박준, 광주시와 전라남도가 분리되기 전)로 조직이 확대 개편하게 되었습니다.
광주시가 광주직할시, 광주광역시로 바뀌면서 흥사단본부 규정에 의해 1992년 광주지부(광주흥사단)으로 될 때까지 조직에 여러 변화가 있어왔습니다.
또한 단운동의 대중화를 위하여 1974년 기러기신용협동조합이 설립되게 되었고 이어서 1976년에는 흥민신용협동조합 이후 광주흥사단신용협동조합으로 이름이 변경되어 금융활동이 흥사단활동과 공존하면서 도움이 되기도 하였으나 어떤 때에는 큰 짐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4. 역대 지부장(대표)을 중심으로

소민 박 준 창립단우 (전 동성중 교장, 1938년 5월생~2001년 2월 작고)
(1965년부터 아카데미 지도위원, 1969년 광주분회장, 1979년 전남예비지부 지부장, 1980년~1986년 전남지부장, 1991년~1992년 광주지부장 역임)

일생을 흥사단운동에 전념하시며 날마다 단소에서 활동가들과 후진을 키우시며 이 지역에 흥사단을 부흥시키셨습니다. 분회장으로, 지부장으로, 신협이사장으로, 평회원으로 그리고 대표로써 오직 흥사단이 자신의 모든 것 이었습니다. 1985년 창립 20주년을 기념하여 회관건립기금을 대대적으로 모금하여 단소 지분 1/10을 확보하는데 기여하였습니다. 이로써 7차례나 옮겨다닌 끝에 현 수기동 5-4번지에 둥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6년 3월 8일에는 ‘광주광역시청소년자원봉사센터’가 개소(위탁운영, 초대소장 김전승, 2006년 ‘광주광역시청소년활동진흥센터’로 명칭변경)되어 올해로 15년째 운영을 해오고 있습니다.


문홍기 원로단우 (약국 경영)
(1975년~1976년 광주분회장, 1987년~1990년 전남지부장 역임)

박준 창립단우와 함께 초창기부터 활동가로 흥사단 동지로써 젊음을 바친 창립세대입니다. 1988년 3월 12일 광주흥사단 사회운동협의회 창립(회장  서명원), 1988년 4월 24일 광주흥사단 교육협의회 창립(회장 최용섭) 등 광주지부에 새로운 운동을 모색을 한 시기였습니다.
1990년 11월 24일에는 서두에서 말씀드린 ‘광주·전남 흥사단 25년의 발자취’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김용선 원로단우 (전 남부대 총장)
(1997년~2000년 광주지부장 역임)

필자가 대학에서 아카데미운동에 동참하던 1971년 이전부터 즉 초창기부터 아카데미지도위원으로 봉사를 하셨고 후일 광주지부가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큰 힘이 되어주셨습니다. 이론적으로 사상적으로 광주흥사단의 기둥이십니다.
2000년 5월 13일~14일 제87차 흥사단전국대회를 광주지부에서 개최하였습니다.


김영석 단우(전 김영석내과 경영, 1949년 6월생~2003년 9월 작고)
(1993년~1996년, 2001년~2002년 광주지부장 역임)

이 시기에 광주흥사단이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1993년 11월 광주흥사단 부설 ‘흥사단청소년연구원’을 개원(초대원장 최용섭)하여 후일 청소년자원봉사센터를 위탁받는 가교 역할을 해내셨고, 서울에 계신 안병욱 원로 단우님의 서예작품을 기증받아 전시회를 개최하여 청소년육성후원기금을 조성하는 등 재정적 측면에서 큰 기여를 하시었습니다. 후일 이 기금은 단소를 되찾는데 밑거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청소년 활동과 복지, 노인복지 그리고 청소년 수련시설 등 미래 예측을 미리 하시고 광주지부가 역량을 준비하도록 채찍을 하셨습니다.


박만규 단우 (전남대 교수)
(2003년~2004년 광주지부장 역임)

우리나라가 IMF 금융위기를 맡게 되고 그 여파로 광주흥사단신용협동조합이 점차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고 2003년 3월 광주흥사단신용협동조합이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으로 결국 전국 130여개 신협과 함께 파산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지부장을 맡아서 단 안팎으로 안정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셨습니다. 2004년 3월 11일 ‘광주광역시서구농성문화의집’을 개관(위탁운영, 초대관장 문정순)하여 단우들에게 큰 선물을 안겨주었습니다.


박돈희 단우 (전남대 교수)
(2005년~2006년 광주지부장 역임)

이 시기에는 광주흥사단이 예금보험공사와 끝없는 법적 투쟁을 이어가는  시련의 시기였습니다. 현 수기동 단소가 신협이 9/10를 소유하고 광주흥사단은 1/10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법에서 패소하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수기동 단소를 떠나야할 처지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광주흥사단에 애정이 있었던 모든 분들이 마음조린 시기였습니다. 그 와중에도 2005년 11월 창립40주년행사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성대하게 열었고, 2006년 5월에는 광주흥사단산악회 주최로 흥사단산악회 전국대회를 담양 금성산에서 가졌습니다. 2006년 10월에는 청소년연구원(원장 노미덕)에 ‘나잘난학교’가 개설되었습니다.


최영태 단우 (전남대 교수)
(2007년~2010년 광주지부장 역임)

2007년 12월 법원경매에 응찰하여 흥사단이 낙찰 받음으로써 현 수기동 단소를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이때 1억을 목표로 회관되찾기 모금운동을 하였는데 무려 1억5천만원을 모금하는 성과를 내었고, 이는 두 달 만에 이루어 낸 것으로, 임원들도 놀랐고 본부에서도 놀랐고 참여한 한분 한분이 모두 놀라는 큰 성과였습니다. (2008.1.14 단소 매입 이전완료)
2009년 3월 23일 ‘광주광역시청소년문화의집’을 개관(위탁운영, 초대관장 장금순)하여 광주흥사단이 청소년활동과 수련시설을 동시에 운영하는 기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2010년 9월 10일 광주흥사단 부설 ‘흥사단리더십아카데미’를 개원(초대원장 장안나)하였습니다. 이로써 내적으로 외적으로 지역에서 역량있는 광주흥사단으로 우뚝서게 되었습니다.


5. 마치면서

여기까지 대강의 광주·전남 흥사단의 역사를 정리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지면의 한계로 적고 싶은 내용을 모두 기록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과거를 정리하며, 미래에 있어야 할 광주흥사단이 어떤 모습인지 함께 생각해 보자고 단우 및 회원님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광주흥사단의 중심인 사무처를 비롯하여 3개의 위탁기관과 2개의 부설기관 그리고 25명의 상근활동가들을 가지고 있는 현재 활동에서 머물지 않고 흥사단 운동이 더 확산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방법은?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각자가 서 있을 지라도 변하지 않는 도산의 정신과 철학을 이어간다면 밝은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리며 글을 맺습니다.

(현재 배출 회원 수 약 6,000여명)

                                                                                                                2010년 11월
                                                     
                                                                                                              글 / 사무처장 장금순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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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구님의 댓글

강창구 작성일

기억도 새롭습니다.
1982년 겨울로 짐작을 합니다.
당시에 고광업 편찬위원장, 박병섭,노성태,그리고 제가 참석해서 단소의 모든 자료들을 뒤적여가면서 가편집과 토의 교정과 수정를 거쳐서 만들었었는데 박준단우님의 기대에는 못 미쳤던 관계로 작업이 중단되었고, 이거라도 가편집을 해 놓자는 의견들이 있어서 약 30부 정도를 찍었었습니다.
저는 주로 창립당시였던 60년대의 기록물을 기초정리 했었습니다.
그동안 님들이 가시고, 벌써 45주년, 50주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많은 인프라가 충원이 되어서 더 좋은 모양으로 나오리라고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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