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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100년 비전포럼 발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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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광주흥사단
댓글 0건 조회 4,148회 작성일 10-03-08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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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왜 흥사단을 창립했나?


          김상기(충남대 국사학과/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흥사단은 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에 의해 조직된 민족운동 단체이다. 대표적인 민족 지도자로 숭앙되고 있는 도산이 창립한 흥사단에서는 안정근, 차이석, 손정도, 김종림, 송종익, 이대위, 이강, 윤병구, 김호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하였다. 흥사단은 오늘날까지 활동이 지속되고 있는 몇 안되는 단체로 주목되고 있으며, 해방 이후의 민주화 운동과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에 따라 사회 일반의 흥사단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크다.

  흥사단이 창립된 지 백주년이 다가온다. 도산은 新民會를 창립하여 국내에서 비밀리에 항일운동을 주도했다. 미주에서도 1905년 共立協會를 창립하고, 1911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이 되어 미주지역의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그러한 도산이 1913년에 흥사단을 창립했는데, 과연 도산이 흥사단을 창립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지? 이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하여 우선 도산이 살았던 19세기 후반이후의 조선의 국내외적인 상황을 이해하고자 한다. 그 중에서 특히 개화기 이후 서세동점으로 조선의 민족적 위기 상황과 이에 대응하는 조선인의 대응 논리를 살펴 흥사단이 창립하게 된 배경을 이해하고자 한다.

1. 19세기 말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과 조선의 대응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조선사회는 커다란 역사적 변동기였다. 흔히 이 시기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일방적으로 조선사회가 식민지화되어 간 시기로 서술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조선이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로부터 이탈하여 근대적 국제질서로 변모하는 시기였으며, 아울러 서구열강과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처하고 또 국내적인 계급모순을 해결하면서 근대민족국가를 수립하고자 노력했던 시기였다.
 조선왕조는 서양의 통상요구를 차단하면서 전통적인 체제를 고수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서구 열강과 일본의 조선에 대한 팽창주의 정책은 가속화되었으며 조선은 점차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외부로부터의 도전은 조선왕조의 성패가 달림은 물론 자칫하면 식민지로 전락할 수도 있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19세기말 제국주의의 침략에 조선에서는 위정척사운동과 개화운동, 그리고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1864년 정권을 장악한 대원군을 비롯한 위정자와 척사유생들은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체제내의 개혁을 단행하면서 철저히 외세를 배척하는 쇄국정책을 추진하였다. 반면에 개화지식인은 문호를 개방하고 서구의 발전된 과학기술과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꾀하고자 한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개화지식인들은 개화정책의 추진 방법과 청일에 대한 외교문제를 둘러싸고 임오군란을 계기로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로 분열되어 갔다. 양 세력은 상호간에 이념과 방법의 차이가 심하여 갈등과 대립이 노정되었으며. 그 결과 급진개화파는 갑신정변을 일으키게 되었다. 급진개화파는 갑신정변의 실패로 몰락하였으며, 청군의 지원으로 재집권에 성공한 온건개화파는 민씨정권에 편승하여 개화정책을 펴 나갔다.
 이와 같이 관료와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개화운동과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할 때 농민층을 중심으로 동학이 전파되었다. 이들은 동학사상에 크게 공감하고 동학농민전쟁에 자신들의 희망과 지향을 투영시키고자 하였다. 동학농민전쟁은 조선 봉건체제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반대하여 동학농민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봉건적인 민중운동이며, 동시에 반침략적인 민족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민씨정권은 동학군의 진압을 위해 외세까지 끌어들였으며, 이는 청일전쟁이라고 하는 국제전으로 비화되기에 이르렀다. 청일전쟁에서의 승세를 업고 일본은 조선을 군사적으로 장악하여 이른바 갑오정권이라고 하는 종속적 내각을 수립케 하였다. 이 갑오정권에서는 갑오경장을 추진하였으나 일본의 간섭으로 제한적인 개혁에 머무르고 말았다.
 척사유생들은 1894년 청일전쟁과 일본군에 의한 경복궁 점령사건〔甲午變亂〕, 을미사변, 단발령 공포에 접하자 의병을 일으켜 갑오정권과 일본에 대항하는 반침략·반개화 투쟁을 전개하였다. 1894-1896년간 전국적으로 전개된 의병투쟁은 갑오정권과 일제 침략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아관파천이 단행되었으며 침략의 일환으로 추진되던 개화정책은 실효를 보지 못하였다. 이 의병 역시 농민군과 마찬가지로 개화정권과 일제의 무력으로 진압되고 말았으나, 1904, 5년 의병을 재기하여 국권수호투쟁을 재개하였다.

 한편 19세기말 근대 국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이 정부 측과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민간에서 각기 진행되었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설립하여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입장에서 이른바 광무개혁정책을 펴 나갔으며, 재야의 개화파들은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사회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상호간에 어느 정도의 지향점은 있었으나,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민간 측의 개혁 요구와 정부의 정책 방향 사이에는 일정한 차이점이 있었다. 특히 정부의 정책은 민권보다는 군주권을 강화하려는 면이 강했으며, 동시에 친외세적인 성격을 띠게 됨에 독립협회에 의해 크게 비판받았다. 그러자 정부는 독립협회운동과 만민공동회 운동을 탄압함으로써 민간 측의 근대국가 수립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20세기 들어서 조선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특히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군사적으로 한국을 점령한 상태에서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을 늑결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정치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이 당면한 최대의 과제는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한국인의 반일투쟁은 유생과 농민이 참여한 의병전쟁과 개화지식인이 주도한 애국계몽운동의 양면에서 전개되었다.

 한말의 의병은 1896년말 해산된 후 잠재상태에 있었으나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재봉기하였다.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이후 의병은 본격화되었으며,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 후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1907년 이후의 후기의병은 일본과의 전쟁의 형태를 띠었으며, 민중민족주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의병은 비록 일본군의 우세한 근대 무기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으나, 국망을 전후한 시기에 만주나 노령 등지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전환함으로써 무장독립투쟁을 계속하였다.

 한편 개화지식인들은 도시를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개화지식인들은 애국단체를 결성하고 신교육을 보급하고자 하였으며, 실업을 진흥하고 국채를 보상하여 국가의 산업과 재정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또한 신문화의 보급을 통한 근대문화의 성립을 꾀하는 등 근대적 민족의식과 근대국가의 건설을 지향하고자 하였다.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은 운동의 주체와 이념 그리고 투쟁의 방법 등 여러 면에서 공통성을 찾기가 어렵다. 또한 실제 운동의 진행과정에서 상호 비방하거나 심지어는 살상하는 등 대립 갈등적인 면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이와같이 의병과 애국계몽운동간에는 이념적인 대립이 있었으나, 국망을 전후하여 연합전선을 위한 통합의 노력이 시도되었다. 특히 도산이 설립한 비밀결사 신민회가 조직되면서 양 세력 간의 연합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연합 시도는 국외에서의 독립군 기지 창건과 무관학교의 설립과 같은 형태로 나타났다. 이러한 양 세력의 노력은 독립전쟁을 위한 통합적인 이념과 방법을 창출해 낼 수 있는 새로운 모색이었다.

2. 흥사단의 창립

 1902년 미국에 유학 간 도산은 1905년 공립협회를 설립하고 공립신문을 창간하였다. 1907년에는 국내에 귀국하여 신민회를 조직했다. 신민회는 대성학교와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대한매일신보를 통하여 근대의식을 고취하는 등 대표적인 애국계몽운동 단체로 평가된다. 도산은 1909년에는 최남선에게 청년학우회를 조직하도록 지도하였다. 도산은 1910년 국내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이 불가능하게 되자 경술국치 직전에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연해주에서 권업회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도산은 미주로 들어가 1911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이와같이 여러 단체를 설립하는 등 개화지식인의 독립운동을 지도하던 도산이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창립한 것이다.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으로 활동하던 도산이 왜 흥사단이라는 단체를 창립했을까? 그것은 대중적인 민족운동 단체를 운영하면서 민족운동을 지도할 인재의 부족과 지도자 간의 대동통합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또한 도산은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구성원들이 대동 단결하지 못하고 분열하고 대립하는 행태를 많이 목도한 결과 민족 구성원간의 대동 단결의 기초가 되는 인격을 갖춘 지도자를 양성해야겠다는 신념을 갖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1) 지도자 양성
 도산은 청년기에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국민주권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그는 1902년 미국에 유학하여 미국의 근대 문명에 충격을 받았다. 반면에 한인들의 무지와 가난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1907년 급거 귀국하여 인민의 지식이 발달된 문명국이 되게 하고자 신민회를 창립하였다. 도산은 신민회를 조직하면서

 조선의 부패한 사상과 습관을 혁신하여 국민을 유신케 하며 쇠퇴한 발육과 산업을 개량하여 사업을 유신케 하며 유신한 국민이 통일 연합하여 유신한 자유문명국을 성립케 함.

이라 하여 신민회가 ‘維新한 國民’의 양성에 목적을 두었음을 밝혔다.
  도산은 1909년에는 청년학우회(Young Korea Academy)의 설립을 지도하였다. 도산은 최남선에게 청년학우회의 취지서를 작성하게 하면서, 취지서에 다음의 내용을 싣게 하였다.

  우리 국가와 민족이 이렇게 쇠망한 근본 이유는 진실한 국민적 자각, 역사적 자각, 사회적 자각을 못 가진데 있다. 배일운동이 있기는 하지만, 그 중에는 그냥 비분강개에 그치는 수가 많고 믿을 만한 책임심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청년운동은 어디까지나 진실을 숭상하여야 한다. 언변보다는 진실을 형용보다는 내용을 존중해야 한다. 그것이 무실역행이다 (최남선전집, 권10)
   
  도산은 청년학우회를 조직하게 하면서 무실역행을 실천하는 청년을 양성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도산은 신민회를 통하여 전 인민의 문명화를 꾀하는 한편 이를 추동시켜 나갈 청년의 양성을 위해 청년학우회를 조직하게 한 것이다. 
  흥사단은 청년학우회의 계승 단체라 할 수 있다. 흥사단의 영문표기가 청년학우회의 영문표기인 Young Korea Academy를 그대로 사용함도 그와 같은 이유때문으로 보인다. 도산은 1913년 민족운동 단체를 설립하면서 명칭을 興士團이라 하였다. 흥사단이란 명칭은 유길준이 1907년 설립한 ‘흥사단’에서 유래한다. 유길준은 인민의 교육으로 사풍을 진작하여 ‘국가부강의 실익’을 이루기 위하여 흥사단을 설립하였다. 도산은 유길준의 『서유견문』에서 감동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 등 유길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도산이 유길준의 흥사단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함도 그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도산은 후일 흥사단의 ‘士’를 해석하면서 “이는 종래 문약에 빠진 우리 사회가 말하는 썩은 선비를 말함이 아니요, 문사와 무사를 합쳐서 일컫는 것이며, 건전한 인격자를 말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흥사단의 ‘士’는 문사와 무사를 칭하는 뜻으로, 흥사단은 사회의 지도적 인물을 양성하는 단체로 해석되었다.
 
  2) 민족적 대동단결의 인재 양성 
  도산이 흥사단을 창립하게 된 것은 민족구성원의 단결에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그는 독립협회 운동에 참여한 이래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설립하여 국권회복운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한 바 있다. 그러나 결국 일제에 의해 국망을 당하고 말았다. 시베리아에서 망명객이 된 도산은 단결하지 못하여 나라가 망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내가 시베리아를 지날 적에 내 마음이 이상히 비참하여져서 많은 눈물을 흘렸소. 박영효 김옥균으로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한데 뭉친 단결이라고는 20명이 없었다. 이러고야 망하지 않을 수가 있느냐. 우리 민족은 너무나 단결상 신의가 박약한 민족이라. 내가 죽는 날까지 다만 한 두사람과 일을 하더라도 낫겠다는 주의대로 철저히 나갈 뿐이라. 네가 나에게 복종하고 내가 너에게 복종하여 한 主義에 모이는 단체를 만들어야하겠다. 죽는 날까지 다만 한 두사람을 만나고 말지라도, 이러한 간절한 마음으로 흥사단이 발기되었소. 지방적이라는 말을 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각도에서 한사람씩 위원을 뽑았소.
 
 도산은 미주로 망명하여 1912년 대한인국민회 지방총회 대표자들과 협의하여 중앙총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도산은 망명생활을 하면서 민족구성원 사이에 단결하지 못함을 보았다. 그는 그러한 실례를 이순신의 경우에서 들고 있다. 이순신과 같은 인물은 지도자로 삼고 후원했어야 하는데, 시기하고 모함하고 거꾸러뜨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근대에도 유길준 같은 인물이 그러하다고 하였다.

우리 역사에 이순신(李舜臣)은 가장 비참하고 적당한 실례입니다. 그를 꼭 지도자로 삼고 후원하여야만 할 처지였거늘 선민들은 시기하고 모함하여 거꾸러뜨리고야 말았고, 근대에도 유길준 같은 어른은 우리의 지도자 되기에 합당하였건마는 우리의 선인들은 그를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고 압박과 무시를 더하다가 마침내 그의 불우의 일생이 끝날 때에야 성대한 회장을 한 것을 보고 나는 슬퍼 하였습니다. 언제든지 이 현상이 변한 후에야 조선 민족이 민족다운 운동을 하는 길에 들어서겠습니다.

  1913년 흥사단은 건전한 인격과 신성한 단체를 구호로 내걸고 조직되었다. 도산은 “흥사단은 무엇을 하든지 온전히 국가와 민족을 중심으로 하여 희생적 인물이 집합한 단결로서 국가와 민족을 향하여 희생하옵세다.”라고 하여 ‘희생적 인물의 단결’을 강조하였다. 이 흥사단주의가 1927년 한독당의 강령으로 발전하여 이른바 大公主義라는 이념이 생기게 된 것이다.

 도산은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도 민족 구성원의 단결과 통합을 강조하였다. 도산은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전쟁론이나 외교론이 중요하고 민지의 개발과 재정의 확충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통일이 없이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고 하였다.

 내가 통일 한다고 많이 부르짖은 고로 ‘안창호의 통일독립’이란 별명까지 있지만은, 독립을 완성하려면 우리 민족적 통일력이 아니고는 될 수가 없으니 독립을 기망하는 우리는 통일의 완성을 위하여 노력을 아니 할 수 없습니다.(중략) 모든 운동의 실현 못됨이 다 이 통일의 궤도를 잃은 때문이외다.
 
 그는 독립운동이 성사되지 못하는 것은 통일적인 구심체가 없이 상호 대립적이고 ‘불통일적’ 형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3. 소결

 도산이 흥사단을 창립한 근본적인 이유는 힘을 기르기 위함에 있었다. 그것은 도산의 기본 철학이라 할 수 있는 ‘힘의 철학’에서 연유한다. 도산은 일찍이 단체의 힘을 인식하였으며, 이에 따라 흥사단과 같은 단체를 조직하여 실력양성운동,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도산은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건전한 인격을 갖춘 지도자들의 대동 단결의 실천이야말로 독립을 완성할 수 있는 기초로 보았다. 도산의 이러한 정신은 흥사단의 약법에 잘 제시되어 있다. 흥사단 약법의 ‘목적’에 의하면,

 흥사단은 무실역행을 생명으로 삼는 충의 남녀를 단합하여 정의를 돈수하고 덕, 체, 지 삼육을 동맹 수련하여 건전한 인격과 신성한 단체를 이루어 우리 민족 전도 대업의 기초를 준비함

이라고 하여 흥사단은 건전한 인격을 갖춘 인재의 신성한 단결을 통하여 민족 전도 대업의 기초를 준비함에 그 목적이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끝)



< 참고문헌 >

1. 주요한, 󰡔안도산전서󰡕상중하, 범양사, 1990년 복간.
2. 윤병석 윤경로, 󰡔안창호일대기󰡕, 역민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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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박만규, 「도산 안창호의 대공주의에 대한 일고찰」, 󰡔한국사론󰡕26,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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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명화, 「도산 안창호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연구동향」, 󰡔도산사상연구󰡕8, 2002
8. 이현주, 「1907-1910년의 청년계몽운동과 흥사단 창립」, 󰡔도산학연구󰡕9,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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